[뉴시스] 우리 역사 속 통일의 경험과 교훈
작성자 뉴시스
등록일 2018-05-12 10: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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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 ‘일통삼한’을 내세워 통일의 정당성을 확보
신라의 삼국 통일은 두 진영이 벌인 국제전의 산물

【서울=뉴시스】 = “한반도의 마지막 통일을 경험한 고려왕조가 올해로 건국 1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남북통일도 누가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의 주도적인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인기 장수프로인 KBS ‘역사저널 그날’에 고정 출연 중인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우리 역사 속에 두 번의 통일 경험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주변 국제정세가 큰 역할을 했다”며 “모처럼 다가온 세 번째의 통일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11일 안민정책포럼(이사장 백용호)이 주최한 조찬세미나에서 ‘한국 역사속 통일의 경험과 교훈’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통일을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가 676년의 신라의 삼국통일과 936년의 고려의 후삼국 통일(고려건국 916년) 등 두 번의 통일 경험을 했지만 통일신라의 경우 정서적 통일까지 이루지 못해 후삼국으로 다시 분열된데 비해 고려의 경우 체제 통일이후 정서적 통일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왕조는 바뀌었어도 분단을 초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북이 국가체제의 통일을 이루어도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나 세상을 보는 가치가 다르고 빈부격차가 좁혀지지 못할 경우 역사속의 경험을 되풀이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정체성의 동질감을 갖기 위한 준비가 매우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이 교수는 특히 호남인에 대한 배척의 근거로 삼았던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지적했다. 훈요십조 중 8조에 있는 ‘車峴以南公州江外 ~’을 호남지방으로 지칭해 왔는데 이는 오역으로 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금강)북쪽 사이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태조 왕건이후 고려와 조선역사에서 실제로 호남사람을 많이 등용해 온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훈요십조를 잘 못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는 이날 이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독점 게재한다. 안민정책포럼은 고(故) 박세일 교수를 중심으로 만든 지식인 네트워크로 1996년 창립됐으며 좌우를 아우르는 통합형 정책 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는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했던 백용호 이화여대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강연 요약본이다.

: 한국사는 오랜 역사 속에서 두 차례 통일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과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그것이다.

후삼국 통일 후 고려, 조선 왕조 천년 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나, 근대에 들어 식민지 해방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또 다시 통일이 역사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이루어야 할 통일을 위해 역사 속의 통일의 경험은 어떤 교훈이 될 수 있을까?

◇신라, 일통삼한의 논리로 통일의 역사적 정당성 확보

통일이란 본래 하나이던 것이 여럿으로 갈라진 것을 다시 하나로 합친다는 뜻이다. 즉, 통일에는 ‘본래 하나’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과연 고구려, 백제, 신라는 본래 하나였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형성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삼국이 본래 하나였음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즉, 신라, 고구려, 백제의 뿌리가 모두 ‘한(韓)’에 있으며, 한이 삼한, 삼국을 거쳐 다시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논리였다. 신라는 이를 통해 통일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삼국 주민들의 통합을 용이하게 하고자 했다.

신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국 분립의 역사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신라의 삼국 통일 후 200년이 더 지나서 후백제, 후고려가 부활해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가 도래한 것은 그러한 분립 의식의 산물이었다.

후삼국은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를 거쳐 재통일로 귀결되지만,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도 ‘일통삼한’을 내세워 통일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주민을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신라와 고려의 통일은 모두 국제 정세와 무관하지 않았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동북아시아에서 당-신라와 고구려-백제-돌궐-일본 등 두 진영이 벌인 국제전의 산물이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삼국 전체를 차지하려는 당과 다시 한 번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라-당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당 서쪽의 돌궐과 티벳이었다. 당과 돌궐, 티벳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신라가 당군을 축출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고구려 고토에서 발해가 건국될 수 있었다. 여기서 삼국통일의 국제적 계기를 찾을 수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중국에 통일 왕조가 존재하지 않고 거란과 5대 왕조가 분열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분열로 말미암아 중국 왕조들이 한반도의 통일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못했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모처럼 외세의 개입 없이 일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후백제, 고려 등 삼국은 중국의 5대 왕조를 상대로 외교전을 펼쳤는데, 이 사실은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분열, 대립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얼마나 불리하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신라·고려, 중국의 5대 왕조 상대 외교전 펼쳐

신라와 고려의 통일은 비록 무력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통일 후에는 주민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고려는 후고려(태봉)을 이어 건국된 나라이지만 신라와 후백제 지역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각 지역의 지방세력을 그 세력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대우했다.

태조 때 이미 전국 지방의 등급을 정하고, 토성을 나누어 줌으로써 지방세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왕실에 대한 충성을 유도한 것이 대표적인 정책이다. 역사 계승 의식에 있어서도 고구려 계승과 신라 계승을 동시에 표방하였다.

고려의 통합 정책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 250년이 지난 13세기 전반까지도 삼국 분립의식은 해소되지 않고 삼국 부흥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는 통일 후에도 각 지역 주민들의 정서적인 통합에 이르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삼국 분립의식은 몽골과 전쟁을 거치면서 해소되었고, 역사인식에 있어서는 한에 선행하는 조선의 존재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 역사 속 통일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은 (1) ‘일통삼한’을 내세워 통일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 (2) 삼국을 둘러싼 국제 환경을 활용한 것 (3) 통일 후 주민 통합을 위해 노력한 것 등 세 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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