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휘] 운명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작성자 매일경제
등록일 2018-01-26 10: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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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검색해보면 대부분의 사전적 정의는 `초인간적인 삶의 주어진 길`로 소개되어 있다. 체념적인 의미가 강하게 드리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운명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느새 운명은 개척과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젊은 세대에게는 즐겁게 맞서서 경쟁하고 이겨야 할 목표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호주오픈 4강 신화를 만든 월드스타 정현 선수는 코트에서 두꺼운 고글을 낀 모습이 잘 어울린다. 하지만 본인이 떳떳이 밝혔듯이 어린 시절 지독한 고도근시를 앓게 되어 초록색을 보면서 뛰어놀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테니스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정시력이 0.6에 불과하지만 운명에 주저앉지 않고 그야말로 멋지게 극복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운명에는 이렇게 맞서야 멋, 성과, 자존감이 조화롭게 찾아들게 된다.

고도근시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의 동반에서 보듯이, 운명은 공교롭게도 고단하고 힘겨운 `짐`과 함께하는 경우도 많다. "백군아, 머릿속에 큰 돌멩이가 있는데 그것 좀 빼줘라." 생을 마감하기 직전 사경을 헤매던 박치기왕 김일 선생이 현재 전남 거금도에서 김일체육관장을 맡고 있는 제자 백종호 씨에게 한 말이다. 박치기 하나로 세계 도처에서 온 거구들을 무릎 꿇리던 김일 선생이었지만, 박치기와 머리는 그가 평생 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짐이었던 것이다.

운명의 무거운 짐은 시인의 눈을 사로잡기도 했다. 반칠환은 `팔자`라는 제목의 시에서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다"고 했다. 하지만 시인은 또 "경이롭잖은가. 저마다 가장 무거운 걸 젤루 잘 휘두르니"라고 했다. 가장 무거운 짐을 가장 잘 다룰 줄 알아야만, 우리는 나비가 되고 공룡이 되고 또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운명적이도록 버거운 짐을 이겨내야만 우리는 운명과의 승부에서 멋지게 한판승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북한 선수단과 공연단은 우리에게 운명이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오로지 지금 정부만이 고민하고 있다는 오만한 생각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 국민들은 화가 났다. 불과 엊그제까지 핵을 만들고 미사일 실험을 하던 북한이 대규모 예술인을 보내서 남한 국민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겠다고 한다. 만약 이걸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에 의아함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선량한 우리 국민들의 이러한 생각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지만, 문제의 핵심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있다.

운명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외롭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남북 대화의 시작을 환영한다고 통 크게 나오고 있지만, 정작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들리는 일부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3월 이후 올림픽 기간에 자제했던 북한의 돌출행동이 다시 불거지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가만있지 않겠다는 입장이 확고해 보인다. 한편 미국과 북한이 현재 직면한 각자의 복잡한 사정을 고려할 때, 남북 대화가 결국 북·미 대화로 이어질 것이고, 이 경우 난생처음 `차이나 패싱`을 걱정해야 할 중국 역시 남북 대화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북한이 핵을 포기할 리가 있겠느냐는 입장이고 또 이 경우 미국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입장이다.

북한발(發) 위기가 우경화의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 일본 역시 남북 대화를 지켜보는 속내가 복잡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위안부 문제까지 겹쳐 일본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다.

언제쯤이면 우리도 시인의 언어를 가지게 될까? 언제쯤이면 우리도 젤로 무거운 북한 문제를 가장 잘 휘두르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게 될까? 북한 문제에 굴복하여 한반도 평화를 우리 스스로 포기하는 비관적인 자세는 절대 금물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극복하는 힘과 지혜가 그야말로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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